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작센 선제후국]]의 [[라이프치히]]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, 어릴 적부터 학문적 성취가 독보적이었다. 현대의 한국으로 치면 불과 초등학생 나이에 [[라틴어]]와 [[그리스어]]를 통달[* 그가 성인이 되어 밝힌 바로는 어릴때부터 매우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공부를 했는데, 기초문법이나 어휘 공부를 한 뒤에, 그 두꺼운 라틴어나 그리스어 고전을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모르는 문법이나 어휘변화가 나와도 억지로 끝까지 다 읽은 뒤, 아예 아직 안 배워서 모르는 문법이나 어휘 부분에 대해 간단히 일부만 공부하고, 바로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한다. 이걸 최소 10회를 반복해서 머릿속에 책 내용이 대략 다 들어올 정도가 되면 눈감고 통으로 책 내용을 다 외워보았다고 한다. 그래서 잘 안되는 부분만 다시 읽었다. 이를 반복하다보니 결국 책의 모든 내용을 암기했는데, 한번 이것에 자신을 붙이니 이렇게 자신이 접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책들을 죄다 통째로 외워버렸다고 한다. 이 미친 암기 방식을 한국나이 9–10살때 이미 완성한 것이니 가히 신급 천재였다. 문제는 이 취미가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져 [[프랑스어]], [[영어]], [[스페인어]], [[이탈리아어]] 등의 유럽어들도 이렇게 공부했던 것인데, 결국 거의 10개 국어를 완벽하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. 그래서 그는 여러 학문연구에서 참고자료로 독일계 자료가 아니면 항상 독일어 번역서를 안 보고, 그게 영국 것이든 프랑스 것이든 원서로만 읽었는데 거의 원어민 속도로 읽었다고 한다. 그가 뉴턴과 편지로 대화할때도 영어로만 썼다.]하다시피 했고, 모든 과목에서 완성형의 능력을 보였다. 이미 어릴때부터 천재로서 유명해서, 살던 지역 전체에 소문이 자자했을 정도. 고작 15살이었던 1661년에 [[라이프치히 대학교]] 법학과에 입학했으며, 1663년에는 [[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]]에서 수학 강의를 들었다. 1666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신청했으나 나이가 어려 거절당하고 [[뉘른베르크]]의 알트도르프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. 그러나 대학 측에서 그를 위해 마련한 교수직을 사양하고, 뉘른베르크의 연금술 사회의 비서직으로 일했다. 이것이 그의 첫 직업이었다. 그리고 같은 해에 마인츠의 정치인 보이네부르크를 만나 법률고문이 되었다. 이후 항소법원의 배석판사로 승진하여 외교활동을 하였다. 1676년, 브라운슈바이크 공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초청되어, [[하노버]]의 궁중고문, [[사서(직업)|도서관장]]으로 활동했다. 이후 브라운슈바이크의 [[벨프 가문]] 곧 [[하노버 왕조|하노버 공가]]를 쭉 섬겼다. 족보연구를 통해 하노버공이 [[선제후]]가 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. 그러나 하노버공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[[영국 국왕]] [[조지 1세]]가 되면서 라이프니츠는 [[낙동강 오리알]] 신세가 되었다. 뉴턴과 싸운 라이프니츠를 조지 1세가 [[영국]]에 데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